고임
고임은 나라 또는 백성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이의 복수형이다. 구약에서 이 낱말은 대개 이스라엘 밖의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몇 곳에서는 고유한 지명이나 집단의 이름처럼 쓰인다. 창세기 14장의 디달은 고임 왕으로 소개되고 여호수아 12장에는 길갈의 고임 왕이 정복된 왕 목록에 오른다. 사사기 4장의 하로셋학고임은 이방의 하로셋이라는 뜻으로 시스라의 근거지였다. 이 낱말의 쓰임을 따라가면 이스라엘이 놓였던 국제 정세가 드러난다. 신약은 같은 낱말을 이방인으로 옮기며 다른 방향을 연다.
고임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낱말이다. 나라를 뜻하는 고이의 복수형으로 우리말 성경은 대개 열국이나 이방으로 옮긴다. 다만 몇 구절에서는 고유명사처럼 남아 읽는 사람을 멈춰 세운다.
낱말의 뜻
고이는 본래 중립적인 낱말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하실 때도 같은 낱말이 쓰인다. 이스라엘 자신도 고이로 불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복수형 고임은 이스라엘 밖의 민족들을 가리키는 쪽으로 굳어졌다. 언약 백성과 그 밖의 세계를 나누는 표지가 된 셈이다.
창세기 14장의 고임 왕 디달
창세기 14장 1절은 네 왕의 이름을 나란히 적는다.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다.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한 다섯 성읍을 쳤다.
디달이 다스린 고임이 어느 지역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특정 나라라기보다 여러 부족의 연합체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오래됐다. 이 전쟁 뒤 롯이 사로잡혔고 아브람이 그를 되찾아 온다.
여호수아 12장의 길갈 고임 왕
여호수아 12장은 요단 서편에서 정복된 왕들을 하나씩 센다. 23절에 돌 지방의 돌 왕 하나와 길갈의 고임 왕 하나가 나온다.
여기서도 고임은 한 민족의 이름이라기보다 여러 무리가 섞여 살던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목록의 방식은 건조하다. 왕 하나 왕 하나를 세는 문장이 이어지며 가나안 정복의 범위를 보여 준다.
하로셋학고임
사사기 4장 2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다고 기록한다. 그 군대 장관 시스라는 이방의 하로셋에 거주했다.
하로셋학고임은 하로셋 하고임 곧 열국의 하로셋이라는 뜻이다. 여러 민족이 뒤섞인 곳이었음을 이름 자체가 말한다.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철병거 구백 대를 마주한 배경이 여기다.
이스라엘과 열국
구약에서 고임은 두 얼굴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치는 심판의 도구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경계 밖의 세계다.
예언서는 여기에 한 방향을 더한다. 이사야 2장은 말일에 많은 백성이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한다. 열국이 심판의 대상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전망이다.
신약에서의 자리
헬라어 신약은 이 낱말을 에스네로 옮긴다. 우리말로는 이방인이라 번역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장면이 그 경계를 다룬다.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열방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며 구약 구절들을 인용한다. 고임이라는 낱말이 담고 있던 거리감이 여기서 다르게 읽힌다.
마무리
고임은 한 도시나 한 인물의 이름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낱말이면서 지명이고 때로는 왕의 칭호에 붙는다. 그 모호함 자체가 고대 근동의 실상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한 작은 나라였다.
함께 읽으면 좋은 구절
- 창세기 14:1 —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의 때에
- 여호수아 12:23 — 길갈의 고임 왕이 하나요
- 사사기 4:2 — 그 군대 장관 시스라는 이방 하로셋에 거주하였더라
- 창세기 12:2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이사야 2:2 —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로마서 15:9 —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